Da Vinci's Pen

몽치(@mongchi_cmcm)님 타로 커미션


둘 만의 세계에 재앙이 찾아온 날


유우와 세계, 그리고 선택해야만 하는 아즐
 

어느 날, 아즐은 세계가 멸망하리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즐과 같은 자들에게 있어서 정보는 곧 돈과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깊게 정보를 파헤쳤건만 그런 아즐에게 돌아온 것은 큰 수익이 아니라, 그 아즐마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습니다. 앞으로 몇 달 안에, 이 세계는 크게 뒤틀려 결국 멸망하고 만다. 아즐이 수많은 조사 끝에알아낸 것은 이 한 문장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헛소문인가 싶었지만, 이윽고 아즐은 이것이마냥 헛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풍문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이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것도요.
 
아즐은 고민합니다. 물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즐의 저울은 심히 기울어져 있었어요. 아즐의 선택 한 번에 이제까지 일구어 온 자신의 커리어, 자신을 믿고 있는 기숙사생들과 세상모든 사람들의 목숨, 그들의 삶, 그들이 앞으로 이 세계에서 이루어 낼 이익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연고도 없고, 마법도 쓸 줄 모르는 이방인 하나의 목숨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언뜻 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거래입니다. 하지만… 아즐 아셴그로트가 그 이방인을 사랑한다면, 모든 전제는 뒤틀립니다. 기울어져 있던 저울은 심하게 요동쳐, 결국 무게를 재지못 하고 망가집니다. 때문에 아즐 아셴그로트는 답지 않게, 오랫동안 고민에 빠집니다. 누가봐도 답이 뻔히 보이는 문제를, 문어 단지 속에 묻어 둡니다. 결국 그도 아직, 17세의 섬세한 남자아이니까요.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어느덧 종말은 누구나 알기 쉬운 형태로 찾아오기시작합니다. 갑자기 모래 폭풍이 일어나 열사의 나라 전체가 마비되고, 산호의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고… 뉴스는 하루 종일 재앙의 결과 값을 송출합니다. 그걸 보고 있던 아즐은, 드디어 결심했어요. 이 이상 결정을 미룬다면, 얼마나 큰 손해가 아즐을 덮칠 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의 아즐은 더 이상 옛날처럼 작은 일에 우는 꼬마 문어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달랩니다. 하지만,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음에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너를 버리겠다는 소식을 전하러 낡은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처음 육지에 발을 내딛었을 때 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즐은 담담하게 선택과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유우는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찻잔을쥔 아즐의 손이 자신보다 더 떨리는 것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계를 지키기 위한 죽음이라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맥락에 오히려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이 순간, 그림이 낡은 기숙사에 없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죽으면 그림은 어떤 반응일까, 너무 슬퍼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그렇게 생각하며 아즐이 내민, 오로라 빛의 작은 유리병을 집어 듭니다. 그러다 순간, 잔뜩 축축하게 젖어 있는 아즐의 스카이블루 빛 눈을 마주하고 말아요.

유우가 이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시 찾아온 죽음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역시 아쉬워요. 이번 생에서는 유우가 이루고 싶었던 것을 모두 이루었는데, 앞으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미래만 남았는데…이 뒤틀리고 꼬인 세상은 언제까지 유우를 괴롭힐 속셈인지, 이제는 사랑하는 이의 손에 죽으라고 유우를 마구 떠밉니다. 유우는 조금 착잡한 기분으로, 아즐이 건넨 유리병을 매만져요. 차가운 표면이 유우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유우는 죽어야만 합니다. 아즐이 그걸 바라기 때문에…….
 
유우에게 있어서 어느덧 죽음은 친우보다 익숙한 것이 되었기에, 유우는 아무런 답을 하지않고 엔딩을 맞이합니다. 먼 옛날 읽었던 동화 속에서, 인어 공주는 자신의 세계를 위해 사랑하는 이의 심장을 단검으로 찔렀더랬죠. 어쩌면 왕자님이 죽음의 순간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그런 결정을 내린 인어공주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우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아주 조금, 그 왕자님의 심정을 알 것도 같습니다. 아즐이 선사한 죽음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데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까요. 충격과 공포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침착함이 유우를 집어삼킵니다.
아즐은 되레 그런 유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어째서 이유조차 묻지 않는지, 보통 사람 같으면 정말 자신을 죽일 거냐며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게 정상인데, 어째서 유우는 반가운 친구를 보는 것 마냥 독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만약 아즐이 조금이라도 덜 어른스러웠다면, 당장에라도 유우에게 건넨 독약을 잡아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즐은 너무나 이르게 어른이 되어서, 코트 자락이 구겨지도록 주먹을 쥔 채로 유우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신과 다르게, 놀랍도록 침착한 유우를 보자니 새삼스레 그녀가 이세계에서 떨어진 이라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나름 만족스런 사랑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유우에겐 그렇지 않았나 봐요. 유우는 아즐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감추었고, 죽음의 순간까지 그것을 밝힐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오후 햇살이 낡은 기숙사를 따사로이 비추는 어느 오후, 유우는 아즐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의 순간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먹먹해서, 아즐에게 심해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요. 아즐은 차라리 유우가 거절하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며칠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유우는 아즐의 눈빛을 보고, 그의 떨리는 손과, 얼마 전 아즐이 구해다 주었던 마법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앙의 소식을 듣고… 짧은 인사 후, 그대로 독약을 목 너머로 흘러 넘겨 버렸습니다. 마치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듯 한 행동. 그 순간 유우의 심정을 아즐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후, 아즐은 유우를 옥타비넬 기숙사에 데려가려고 했어요. 기숙사에 둘 수 없다면, 산호의 바다 한 구석에 유우를 위한 동굴을 마련해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즐이 뿌연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고, 다시 안경을 고쳐 쓴 그 순간 유우는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놀란 아즐이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유우는 지우개로 지워진 듯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어요. 유우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언젠가 아즐이 묶어 주었던 노란 리본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즐은 그 때 처음으로, 유우가 평범한 인간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간 유우가 놀랄 정도로 NRC의 생활에 익숙했고, 자신에 대해 잘 알고,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죽음의 순간에 그렇게 태평했던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유우는 아즐을 원망하지 않아요. 오히려 아즐이 조금 더 빨리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 유우도 나름대로 아즐에게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유우는 아즐이 앞으로 어떤 사업을 펼치고, 모스트로 라운지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이야기하는 순간을 좋아했어요. 당당하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아즐의 눈은 마치 푸른 바다에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듯 반짝였으니까요. 유우는 그런 아즐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기에, 외로운 새드엔딩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아즐을 원망할 리 없어요. 오히려 아즐이 매정한 자신을 원망하지 말아주길 바랄 뿐입니다.
이후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워졌고, 몇몇 학자들만이 이상 현상에 대해 떠들어대다 잠잠해졌습니다. 모두가 종말에 대해 인식하지도 못 한 채로, 그렇게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구해졌습니다. 한 이방인을 알고 있던 자들만 잠시 슬픔에 젖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학교는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냅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아즐은 문어 단지에 갇힌 것 마냥 멈춰 있어요. 여전히 모스트로 라운지는 성황입니다. 옥타비넬 기숙사는 전년도보다 더 유능해진 기숙사장 아즐 아셴그로트에 의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아즐의 당찬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은, 이제 아즐의 곁에 없습니다.
유우가 죽은 이후, 아즐은 유우의 지난 흔적을 파고들었어요. 어쩐지 처음 만날 때부터 이상했다는 그림의 이야기, 또래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다는 에이스와 듀스의 이야기, 그리고 유우가 남겨두고 간 노란 리본… 그 모든 것을 한참 파헤친 끝에, 유우는 아즐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 버렸어요. 이미 유우는 다른 시간을 향해 떠났고, 아즐만이 그 잔향을 되짚으며 주저앉아 있을 뿐입니다. 독약을 삼킨 건 유우인데, 정작 중독된 건 아즐인 것 같아요. 아즐은 그날 이후,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낡은 기숙사 근처를 산책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자신에게로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듯...


추가질문


Q. 혹시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A. 안타깝지만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유우가 살아가게 될 시공에는, 유우를 사랑하는 아즐이 아닌, 다른 아즐이 유우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한 번 엇갈린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아즐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과거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거예요. 머리로는 그만 유우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정작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이 등을 떠밀어 유우를 죽인 것 같다는 죄책감이 자꾸만 아즐을 집어삼켜요.
 
만약 꿈에서 만나게 된다면, 아즐은 유우에게 말 한마디 걸 수 없습니다. 유우는 이미 다른 사람의 곁에서 행복하거든요. 아즐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은 유우를 붙잡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옥타비넬은 자기책임의 기숙사, 자신이 유우를 떠나보냈다면 마땅히 그 결과도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에요. 유우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지 않아 다행이지만, 해맑게 웃는 유우를 보며 한 번쯤은 자신의 생각을 해 주면 좋겠다고, 괜히 중얼거려 본다고 합니다.

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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