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b(@2bcms)님 글 커미션
딸랑.
투명한 유리문이 열리며 경쾌한 종소리가 짧게 울렸다. 벌어진 틈 사이로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고, 아담한 내부를 한차례 훑은 뒤 자취를 감춘다.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짧은 찰나가 지난 뒤, 마룻바닥과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와 나무판자가 삐그덕거리는 작은 소음이 울렸다. 유우는 잔을 닦다 말고 고개를 들어 이 모든 소란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특색 없는 외모의 한 남자였다. 유우는 반사적으로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크림 단지와 레몬 소다
고개를 들어 올린 유우의 시선 끝에 짙은 군청색 커튼이 걸렸다. 저 커튼을 걷으면 얼룩 한 점 없는 깨끗한 유리창 너머로 맑고 새파란 바다가 드넓게 펼쳐질 것이다. 유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바다가 보기 싫어 커튼을 쳐둔 장본인이 유우 자신이었으니. 바다 근처에서 일을 하며, 바다를 보기 싫어한다는 것만큼 모순적인 일도 없겠으나 유우는 직장을 옮길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매일 아침 성실하게 출근하고, 카페를 돌보며 커피를 내렸다. 단지 답답한 커튼을 빈틈없이 치고 있을 뿐이다. 창 밖의 물보라가 조금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유우는 쥐고 있던 잔에 남아 있는 거품을 마저 헹구고, 소서와 함께 찬장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달그락. 무감한 마찰음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은 남자가 보였다. 유우는 메뉴판을 품에 안고 손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새 손님은, 연신 주변을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태를 전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주문하겠냐는 유우의 물음에 메뉴판 가장 위에 적힌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는 자신이 무얼 시켰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유우는 군말 없이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카운터로 향했다.
고요한 카페에 드르륵, 하고 원두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사이 사이로 먹먹히 끼어드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백사장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며 까르륵 터트리는 웃음소리들. 일상적인 평온함이 작은 실내에 가득 차 있었다. 유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군청색 커튼을 또 한 번 바라봤다. 이곳은 바다와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 두려운 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가려 뒀음에도, 늘 제 곁에 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동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한 번 돌리자 곱게 분쇄된 새카만 가루들이 흩날린다. 재를 닮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유우는 멀고도 익숙한 통증을 떠올린다.
이 해변 근처에는 낡은 수족관이 하나 있었다. 크지 않은 규모의, 이제는 관광객들도 찾지 않는 잊힌 수족관. 바로 곁에 광활한 바다가 있음에도, 평생을 작은 수조에 갇혀 살아가야만 하는 가엾고도 불운한 영혼들.
그라인더의 손잡이가 다시 한번 돌아가고, 고동색 가루들이 소복이 쌓인다. 수족관을 떠올리면 함께 끌어올려지는 낡은 기억이 있었다. 수조가 있던 카페, 인어들이 주인으로 군림하던 작은 왕국. 그곳에서 일을 하던 과거. 유우 자신이 가두었던 인어 공주.
또 다시 손잡이를 돌리자, 칼날이 벽을 긁는 흉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은 원두 한 알이 형체 없이 떨어진다. 이때 유우는 다시 한 번 통증을 떠올렸다. 사라지지 않는 흉터, 잊히지 않는 심장의 상흔.
유우는 학창 시절 이후로는 줄곧 바다를 두려워 했다. 바다가 남기고 간 고통을 기억했다. 무엇보다 바다에는, 인어 공주가 있었다. 인간의 두 다리를 얻었던 인어. 육지를 제 영역으로 삼던 커다란 문어. 그래서 유우는 바다를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야 언젠가 인어 공주가 다시 한 번 육지에 올라올 수도 있는 거니까. 인어 공주가 다시 한 번 땅 위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어떤 얼굴로 서로를 구속하고 배신한 상대를 마주해야 하는지 아직 알지 못하니까.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물이 짙은 색 가루를 적시고, 그 아래로 새카만 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뜨거운 물에서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어. 인어도 예외는 아니지. 그윽한 향기가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물속에서 향을 맡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유우의 손 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심해와 단절된 것들뿐이다.
유우는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잠시 바라보다 말고, 몸을 돌렸다. 냉장고의 문을 열고 커다란 도자기 그릇을 꺼내 아일랜드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벽에 걸려 있는 거품기를 들었다. 두 금속이 규칙적으로 스치는 소리가 반복되고, 커피가 흘러내린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유우는 새하얀 크림이 두껍게 올라간 새카만 커피를 남자의 앞에 내려놓는다.
주문하신 아인슈페너 나왔습니다.
남자는 하는 둥 마는 둥 감사 인사를 웅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줄곧 창밖의 백사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유우는 손님의 기행을 신경 쓰는 대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테이블을 닦고, 사용한 기구들을 정리하고, 바닥에 생긴 얼룩을 닦아낸다.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가 작은 카페에 내려 앉았다. 카운터 근처에 앉은 유우는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 백사장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람들이 모래를 밟을 때면 들리는 사각거림, 이름 모를 바닷새의 울음. 그 모든 소란이 유리창과, 두꺼운 커튼을 비집고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카페가 그 모든 바다의 소란과 단절되려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유우는 다시 한번 군청색 커튼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뒤로 단 한 번도 커튼을 걷은 적 없었다. 몇 손님은 바닷가 근처의 카페가 창문을 가려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유우는 상냥한 웃음으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다른 세계의 일 따위, 그곳에서 모두에게 잊히는 저주에 걸렸던 소녀의 속사정 따위, 전부 그들에게는 알 바 아닌 인간사일 테니.
그때,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이 실내의 적막을 가르며 유쾌하게 흔들렸다. 딸그랑. 유우는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열린 문틈 사이로 늦여름의 뜨겁고도 텁텁한 대기가 물씬 밀려왔다. 이번에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한 여자였다. 걸음걸이에서부터 활기가 느껴지는 상쾌한 사람. 처음엔 특색 없는 남자, 두 번째는 활력 있는 여자.
여자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카페의 구석 자리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종이 울리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남자가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이마를 찡그렸다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길 반복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묻는다.
당신 나를 기억해요?
남자는 대답을 찾는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결국 짧은 답을 내뱉는다.
네. 기억해요.
여자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재차 묻는다.
정말요? 모든 걸 다요?
남자는 여자의 가벼운 어조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답변을 내놓는다.
예.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까지 무엇 하나 잊지 않았어요.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은 여자는 결국 파하학 웃음을 흘리고, 그의 맞은편에 마주 앉는다. 유우는 다시 한번 메뉴판을 품에 앉고 구석 자리의 테이블에 다가섰다. 주문은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여자는 메뉴판을 넘겨 보지도 않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레모네이드요!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 잔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유우는 담담히 응수한 뒤 카운터로 돌아갔다. 카운터 아래의 서랍을 열자, 이번 여름에 수확한 레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우는 그것을 꺼내 도마 위에 올린 뒤 반을 가르고, 즙을 짜냈다.
반으로 나뉘어 과육을 훤히 내보이는 레몬을 비틀 때마다, 불투명한 액체라 투명한 유리잔의 벽에 튄다. 그 조용한 작업을 뒤로 하고, 두 손님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몇 년 전 이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를 함께 보낸 뒤 몇 년 뒤 똑같은 날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니,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유우는 찬장에 올려둔 레몬 시럽을 꺼냈다. 이번 여름이 시작할 무렵 만들어 둔 것인데, 얼마 남지 않은 것이 곧 바닥을 보일 성싶었다.
유우는 유리병의 입구를 기울여 시럽을 천천히 따랐다. 빠르게 흘러내리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금세 끝이 나고 끈적한 시럽 방울이 둔하게 맺혔다. 이번 여름의 레모네이드는 이걸로 끝이구나.
작은 카페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드라마, 이번 여름의 마지막 레모네이드, 군청색 커튼 아래 숨겨둔 통증.
이별과 재회의 대가.
유우는 얼음으로 가득 찬 유리잔을 여자의 앞에 내려뒀다.
주문하신 레모네이드 나왔습니다.
감사해요.
짧게 대꾸한 여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유우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군청색 커튼 아래,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 이제는 잊혀진 낡은 수족관. 사라지지 않는 학창 시절의 상처. 이세계에 남겨두고 온 인어 공주.
다른 세계에 있는 네 바다와, 내 세계의 바다가 이어져 있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진 않았다. 내가 백 번이고 바다를 마주해봤자, 내가 두려워하는 원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을 터다. 그럼에도 유우는 바다를 기피했다. 유우는 그의 마법을 잊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왕자와 달리, 인어 공주가 능숙한 마법사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유우는 모든 사소한 가능성 앞에서 두려워했다. 인어 공주가 마법으로 다른 세계를 찾아낼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유우는 바다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렇지만, 왕자는 인어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과오를 바로 잡고,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제 앞에서 사소한 기적이 벌어졌듯이. 방금 막 한 어린 연인이 재회했듯이. 어쩌면 그들에게도, 인어 공주와 왕자에게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어 공주가 마법으로 다른 세계를 찾아낼 가능성과 같은 크기로.
구석 자리의 두 사람이 터트린 청량한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느릿하게 퍼져 나갔다. 유우는 군청색 커튼을 흘끗 바라봤다. 다만 그것을 활짝 걷지는 않았다. 아직은 그럴만한 때가 아니었다. 왕자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흉터는 스스로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가려주지 않는 한, 흉터는 영원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안선 앞에서 인어 공주와 다시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투명한 유리잔만을 남겨두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우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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